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어른 김장하, 한 사람의 신념이 만든 조용한 혁명

by 기름띠지식 2025. 4. 8.
반응형

2025년, 문형배 헌법재판관에 의해 다시금 주목받은 이름, 김장하.
많은 이들이 "그가 누구인가?"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그를 아는 이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진짜 어른이셨다”고.


어른 김장하선생
어른 김장하선생

어린 시절과 가족사

김장하 선생은 1943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투신한 김철수 선생으로,

항일 운동 중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습니다.


가난과 고난 속에서 자란 그는 아버지의 뜻을 잇기 위해,
‘조국을 위한 삶’ 대신 ‘사람을 위한 삶’을 선택합니다.


사업가가 아닌, 실천하는 어른

김장하 선생은 1960년대 말부터 한약방 ‘남성당’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자영업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익은 곧 사회적 환원의 수단이었고,

돈은 사람을 돕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 “사람이 밥을 먹고 살 수 있어야 나라가 있는 거지.”
    그가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입니다.

장학사업과 교육지원

그는 평생에 걸쳐 무려 1,000명이 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별도의 재단 없이, 정부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신의 수입으로 조용히, 꾸준히 지원했습니다.


실제 문형배 헌법재판관도 그 장학금의 수혜자였고,
김 선생의 말 한마디가 그의 인생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맙다고 하지 마라. 나에게 갚지 말고, 사회에 갚아라.”

 

이 말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김장하라는 사람의 철학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 후손 지원

김장하 선생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가난 속에 방치된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정부 지원이 미미하던 시절, 그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유공자 가족을 찾아 직접 도움을 주었습니다.

  • 주거 지원, 생계비 지급, 의료비 지원 등
    그의 손길이 닿은 곳은 전국 곳곳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조용히, 이름 없이 움직였습니다.

그는 왜 ‘어른 김장하’였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른이 사라졌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김장하 선생은 그런 시대에도 ‘어른’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준 사람입니다.

  • 신념 있는 삶
  • 이익보다 공익을 먼저 두는 삶
  •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자세

그는 법률가도 정치인도 아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치와 정의, 책임과 윤리를 가르친 사람이었습니다.


사회에 남긴 영향력

김장하 선생이 국가에 공식적으로 요청한 공로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실천은 다음과 같은 사회적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 민간 장학 시스템과 지역 인재 육성의 모범이 됨
  • 독립운동가 후손 처우 개선을 위한 여론 형성
  • 시민 주도형 나눔과 윤리경영 모델의 뿌리

그는 거창한 구호 없이, 실제 행동으로 ‘시민의 힘’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질문

김장하 선생은 우리에게 거창한 유산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 내가 가진 것을 사회에 어떻게 환원할 수 있을까?
  • 내가 속한 공동체에 어떤 가치를 더할 수 있을까?
  • 우리는 ‘잊힌 사람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어쩌면 아직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일지도 모릅니다.


💡 마무리하며

김장하 선생은 여전히 살아 계시며, 지금도 조용히 후원을 이어가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삶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질문하게 됩니다.
“무엇이 진짜 가치 있는 삶인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
그의 삶을 따라가보는 일,
그것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작지만 강력한 희망의 불씨가 되기를 바랍니다.

반응형